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MBC 대학가요제 (문단 편집) == 역사 == [Youtube(CKJ_H0oW7as)] 서막 1회 방영분. [[1977년]] [[9월 12일]] 문화방송의 주도로 1회가 개최되었고 [[샌드 페블즈]]의 [[나 어떡해]]가 초대 우승을 장식했던 스타트들 끊었다. 이면에는 많은 사연이 얽혀졌는데, 이 곡은 [[산울림]]의 [[김창훈]]이 작곡하고 대학 밴드에게 양도하던 곡이었지만, 정작 본인이 참여하던 밴드 무이(산울림의 전신)는 [[김창완]]의 졸업으로 예선 1위를 차지하고도 자격 미달로 낙방하는 아이러니를 겪고 말았다. 그래도 계기가 되어 눈도장을 받은 산울림은 [[산울림 1집]]으로 전국적 히트를 기록했으니 비록 입상은 아니지만 대학가요제는 첫선부터 상당한 거물을 배출해내 쾌조의 스타트를 보였고 수많은 대학생들의 로망으로 우뚝서게 된다. 기성가요계와 대비되는 캠퍼스만의 신선함과 건전함[* 이 무렵 한국은 여전히 연예계의 [[대마초]] 파동이나 [[금지곡]] 지정이 횡행했고, [[건전가요]]도 앨범마다 삽입되었다. 제3회 대학가요제 앨범에도 건전가요 '나의 조국'이 삽입되어 있다.][* 80년대 대학 진학률은 30%대에 머무는 정도였고 그만큼 부유하거나 명석한 선택받은 인재들만이 갈 수 있는 시설이었다. 장차 나라의 미래가 될 인재들에겐 대중들은 호의적인 시선들이었고 속칭 [[딴따라]]로 위시되는 뮤지션(연예인) 무시 풍조로부터도 자유로운 편이었다.]을 주된 콘셉트로 잡아 첫 단계에서부터 대중적인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고, 이후 수많은 가요제가 본격적으로 번성하는 계기가 된다. 그러나 당시 정부가 생각하던 '건전함'이 무색하게도 당시 학생운동권에서는 상업주의나 퇴폐를 조장한다고 하여 대학가요제를 좋지 않은 시선으로 보았다. 이에 전대협-한총련은 [[1988년]]부터 [[2002년]]까지[* [[1991년]] 4회까지 정기적으로 개최됨.] [[http://rinks.aks.ac.kr/RINKSRedirect.aspx?sCode=ENCYKOREA&sId=E0072282|'통일노래한마당']]이란 대안 행사를 열었다.[[https://brunch.co.kr/@back2analog/173|브런치 자료]] [[1990년대]] 이전의 대학가요제는 그야말로 신규 음악인을 발견하는 ‘등용문’이었다. 당시에는 음반산업이 막 일어나기 시작한 시기였고, 음악인들의 정규화된 성장 및 데뷔 과정이 없었다. 음악인들은 대학가나 일부 클럽 등에서 공연을 하며 명성을 쌓은 뒤 소수의 프로듀서에 의해 발탁되는 정도였다. 그러나 오히려 취약한 미디어 체계, 변화적인 시대상황 등으로 인해 [[예술]]에 대한 민중적 갈망은 컸고, MBC 대학가요제는 공영방송 주도의 프로그램으로 압도적인 권위를 자랑하는 가요제로 자리매김해갔다. '''대학생'''이란 조건만 맞추면 되기에 대학의 지역이나 서열 상관없는 [[탕평책]]스런 입상 목록을 확인할 수 있는데, [[인서울]] 대학교부터 경상도나 전라도 소재 지방 대학교 까지 출신대학교가 다양하게 분포되어있으며 [[무한궤도(밴드)|무한궤도]]의 사례같이 멤버들이 굳이 같은 대학교를 맞출 필요도 없이 타 대학교 출신끼리도 연합한 그룹도 참여가 가능하다. 게다가 [[미국]], [[일본]] 등 해외 주재 대학교에 재학하는 유학생이나 교포들도 참여 자격이 주어진다. 제1회에서는 학생들의 창작곡 외에도 번안곡들도 많이 참가하였으나, 그 뒤 회를 거듭하면서 차츰 자작곡으로만 채워지게 되었다. 초창기에는 매 대회마다 LP판을 발행하였는데, 시대가 시대인지라 상술한 대로 건전가요라든지 다른 기성가수들의 곡이라든지 해당 가요제의 참가곡이 아닌 다른 회차의 참가곡들까지 어물쩡 삽입되었다. 1회 입상곡 및 참가곡이 음반으로 나왔을 때, [[함중아]]의 '내게도 사랑이'가 같이 들어간 것이 대표적인 사례. 사정을 잘 모르는 사람들은 [[함중아]]가 대학가요제 출신인 걸로 착각한다. 대학생들의 무대라는 점에서 [[청춘]]과 낭만의 이미지가 강한 행사였고, 아예 대학가요제만을 목표로 대학에 진학하느라[* 영화 [[택시운전사]] 중 대학생 캐릭터 구재식([[류준열]] 扮)의 대사, "저는 대학가요제 갈라고 대학갔는데요".] 학업은 뒷전이었던 먹고대학생도 존재했을 지경이었다. 이처럼 80년대까지 젊은 대학생들을 중심으로 아마추어리즘 넘치는 투박하면서도 혁신적인 음악성들로 한국 가요계에 다양성을 부여했으며 세계 가요의 물결이었던 [[록 밴드]]의 한국내 공백 또한 대학가요제에서 메웠던 셈이었다. [[송골매]], [[마그마(밴드)|마그마]] 등이 이런 물결속에서 출범한 하드록/메탈 밴드였다. 촬영 장소도 문화체육관 또는 [[서울종합운동장 실내체육관]] 등 실내에서 펼쳐졌으나, [[주철환]] PD의 아이디어로 [[1994년]] 18회 때, 처음 [[캠퍼스]]([[고려대]])에서 펼쳐져 이후에는 대학교 캠퍼스에서 열리는 것이 대학가요제의 트레이드마크가 되었다. 대학가요제는 오래된 역사에다 가수의 등용문으로도 큰 기능을 했기 때문에 많은 MC들과 새내기 가수들이 이 대회를 통해 유명세를 얻었고, 이들 중 오늘날까지 방송가에서 활동하고 있는 인물들도 많다. [[1970년대|1970]]~[[1980년대|80년대]]의 수상자들은 대학가요제 n주년 특집 무대에 다시 초청되어 당시 수상곡들을 새롭게 선보이기도 하며, [[열린음악회]]나 [[나는 가수다]] 등 지상파 가요 프로그램에서 당시 수상곡이나 히트곡들을 간간이 리메이크되어 무대에 올라오기도 한다. 7080 세대의 향수를 자극하는 컨셉트의 [[컴필레이션 앨범]]에도 준 [[필수요소]] 급. || [Youtube(SVxiqGiLMCM)] || || [[신해철]]([[무한궤도(밴드)|무한궤도]])의 1988년 제12회 대학가요제 영상 || 대학가요제에서 배출해낸 뮤지션 면면만 보더라도 . [[산울림]], [[심수봉]], [[송골매]], [[노사연]], [[김학래]], [[원미연]], [[유열]], [[이무송]], [[무한궤도(밴드)|무한궤도]], [[주병선]], [[이정석]], [[김경호]], [[김동률]] 등등. 시대를 풍미하던 가수들의 이름들이 대학가요제를 통해 세상에 드러나던 것이었다. 역대 MC들도 유명인사들로서 그 일부만 꼽아보면 현 [[SM엔터테인먼트]] 회장인 [[이수만]]부터 시작해서 명현숙, 초대 뽀미언니 [[왕영은]][* 비록 대학가요제는 아니지만, 왕영은은 TBC 해변가요제 출신이기도 하다.], [[임예진]], [[이덕화]], [[김희애]], [[이문세]] 등. MBC 대학가요제의 위상을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이다. [[2003년|2003]]~[[2011년]]까지는 남자는 바뀌어도 [[이효리]]는 바뀌지 않았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